알프레드 슈츠: 20세기의 사회과학의 철학자

 

 

알프레드 슈츠는 그의 사상이 점차 전 세계적으로 그리고 19개 학문분과에서 14개 국어로 평가받고 있는 철학자이자 사회과학자였다. 오늘 나의 목표는 그의 사상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여러분을 돕고자 노력하는 것이고 그리고 이어서 아마도 여러분들은 그의 저술들을 읽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의 저술들은 20세기의 어떤 철학자에 의해서 읽혀진다해도 이해하기 가장 쉬운 저술들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사상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알프레드 슈츠가 한 인간으로서 하나의 전체 삶을 어떻게 살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제자들을 열정적으로 돌봤고, 그도 보답으로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슈츠의 삶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그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태어나서 자랐고 나찌가 오스트리아를 지배하기 시작한 1938년까지 그곳에서 일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와 그의 가족은 파리를 거쳐 그가 나머지 여생을 연구하고, 일하고 강의한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우리들은 슈츠의 삶과 그의 사상이 서로 뒤얽힌 이야기들로 들어가기 전에 슈츠의 사상은 가장 좋은 언어로 학제간을 꿰뚫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자 한다. 그가 강의를 시작할 때 그는 철학뿐만 아니라 사회학도 가르쳤다. 또한 그는 경제학이나 언어학 또는 정치학을 가능한 아주 쉽게 가르칠 수 있었다. 여러분이 보시다 시피 그는 보편적인 학문 접근 방법에 관심을 가졌으며 바로 이런 저런 특별한 학문분과가 아니라, 모든 사회과학이 공유하는 기본 사상들에 관심을 가졌다.

     우리는 슈츠의 어린시절에 대해서 슈츠의 부인인 일제(Ilse) 1981년 구두로 된 역사적 기획물을 위한 인터뷰에 응해주는 행운을 갖게 되었다.

 

나의 남편은 1899 4 13일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이름은 요한나 슈츠이고, 결혼전 성은 피알라였다. 그녀는 체코스로바키아에서 1873 11 19일에 태어났으며 1955 2 28일 미국에서 죽었다.

 

     일제는 알프레드 슈츠의 아버지 이름도 알프레드 슈츠인데 그의 아버지는 그의 아들이 태어나기 거의 2달 반 전에 어떻게 죽었으며, 몇 년 지나서 그의 어머니는 그녀의 남편의 동생인 오토와 어떻게 결혼했는가를 - 그 당시는 이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 계속해서 설명했다. 그의 어머니는 항상 알프레드 슈츠에게 큰 꿈을 갖고 있었고 슈츠는 학교에서 항상최우수 학생이었다. 그는 8년 동안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배웠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잘하고 있는 것들을 그가 잘 할 수 있도록 항상 도와주었기 때문에 그는 스포츠를 많이 하지 못했다. 젊었을 때 그는 문학과 그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이는 전 생애를 걸쳐서 계속되었다. 그는 실제로 벨리니의 피에타와 렘브란트의 유대인 신부 그림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그가 가장 사랑하는 예술은 음악이었다. 알프레드 슈츠의 아들 죠지는 그가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가 자신(죠지)이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에 대해서 어떻게 말해주고 있는가에 대해서 우리들에게 들려줄 것이다.

 

비엔나에서 자란다는 것은 바로 음악에 둘러 쌓여있다는 것이었고 그것은 바로 일상생활의 일부분인 것으로 보였다. 따라서 나의 아버지는 그가 아주 어렸을 때 음악회에 갔다. 물론 오페라의 입석자리는 하나의 전통이었다. 그곳은 바로 여러분이 사람들을 만나는 장소였고 바깥의 거리 청소부는 그들이 전날 밤에 들은 오페라의 아리아들을  부르곤 했다. 그리고 물론 나의 아버지는 그가 경험한 모든 것에 대해서 열심히 배우고자 했다. 따라서 그는 도서관에 갔고 그곳에서 연구를 상당히 많이 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그는 결국 그의 지식이 대단히 여러 분야에 걸쳐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지도를 받고자 오는 많은 전문가들보다도 음악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아냈다.

  

     알프레드 슈츠가 17살의 나이로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그는 오스트리아 군대에 입대했다. 이때가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이었을 때였다. 그는 만성 귀염 때문에 병역임무를 피할 수 있었지만, 의사들에게 그것을 말하는 것을 택하지 않고, 다소 죽기를 작정한 것 같았다. 그는 포병으로 입대했고 훈련을 받은 후에는 전선과 본부 사령부 사이의 통신망을 깔고 복구하는 임무로 배치되었다. 그는 전선에서 10개월을 보내고 나서 전선으로부터 비엔나로가는 마지막 열차로 알려진 것을 타고서 휴가를 떠났다. 그가 비엔나에 도착했을 때, 그는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알았고 군주제를 종식시킨 혁명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슈츠는 즉시 비엔나 대학에서 정식공부를 시작했다. 참전용사로서 그의 유일한 혜택은 그가 4년이 아니고 2년 반만에 대학을 졸업할 수 있다는 것이었지만, 여전히 동일한 양의 공부를 해야만 했다. 그는 법을 공부하면서 국제법을 전공했다. 그의 지도교수는 한스 켈젠(Hans Kelsen)이었다. 그는 비엔나 국제 무역 아카데미를 운영했다. 그리고 후에 그는나는 경제학과 법이론의 가장 구체적인 문제들에 매달려 왔다는 것을 탈코트 파슨스(Talcott Parsons)에게 이야기했다.

   교육적으로 다음에 일어난 것은 슈츠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 중에 하나인 유명한 경제학자인 프리츠 마하럽(Fritz Machlup)이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1980년에 죠지 슈츠가 그를 인터뷰를 했다.

 

1924년 당신의 부친과 내가 멤버이기도 한 루드비히 폰 미제스(Ludwig von Mises) 교수의 개인 세미나에서 당신의 부친을 만난 것으로 기억한다. 이 세미나에는 아주 젊은 사람들만 참여했다. 그리고 모든 멤버들은 학제간을 관통하는 연구에 관심을 가졌다. 따라서 법률가들이 많이 있었지만 어떤 법률가도 법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당신의 부친은 법학 학위를 소지하고 있었다. 경제학은 법학과에서 가르쳤다. 따라서 당신의 부친은 바로 시작하면서 경제학 과정에 들어갔지만 동시에 과학철학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또한 방법론이 그로 하여금 항상 어떻게 우리 경제학자들이 생각하고자하는가, 어떻게 우리가 논의하는가, 어떻게 우리가 추론하는가 그리고 어떤 것이 타당하고 어떤 것이 타당하지 않은가를 결정하는 방법이 무엇인가에 대해 항상 많은 관심을 갖게 했다. 나는 곧 슈츠의 생각에 크게 귀를 기울리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세미나가 끝나고 나서도 우리들은 토론하느라고 많은 시간을 보내는 적이 아주 많았다. 나는 우리들이 때로는 거리를 걸으면서, 끝없이 토론하고 토론하면서 새벽 3시나 4시에 가서야 이야기하는 것을 끝낸 날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그리고 나는 아주 자주 당신의 부친이 사물을 보는 방식에 대해서 큰 이의를, 내적인 이의를 제기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주 자주 나는 그에게서 이성적으로 사유하는 방식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나는 나 자신을 당신 부친의 신뢰하는 제자라고 생각한다.

 

     알프레드 슈츠가 그의 친구 마하럽 같은 사람과의 열띤 대화뿐만 아니라 루드비히 폰 미제스의 개인 세미나 같은 지적 서클에 참여함으로써, 그는 비엔나에서 다 학문 연구의 고급과정을 밟았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알프레드 슈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철학자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은 슈츠가 낮에는 최고 경영자였고 밤에는 현상학적 철학자였다고 말하곤 했다. 슈츠 자신은 그가 철학자였기 때문에 더 좋은 사업가가 되었고 그가 사업가였기 때문에 더 좋은 철학자였다고 말했다.

   슈츠가 법학 학위를 받기 2달 전에 그의 스승인 폰 미제스는 그에게 27개의 비엔나 은행으로 이루어진 한 은행그룹과 일하는 직장을 갖도록 했다. 그는 10명을 감독했으며 오스트리아 통화개혁과 국제연합의 대출개혁을 다루는 계획들에 참여해서 일했다. 1927년에 슈츠는 60명을 감독하는 라이틀러 은행의 집행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로베르트 람베르트가 그의 상사였다. 전쟁 바로 전에 슈츠는 R. 드라이푸스 회사의 국제 소유권을 인정해 주는데 관여했다. 이 회사는 하이네켄 맥주회사의 소유권을 갖고 있었다. 슈츠는 비엔나, 파리 그리고 나서의 여생 동안에는 뉴욕에 있는 동일한 회사들에서 비슷한 직책을 갖고 있었다.

6년의 구애기간 끝에 알프레드 슈츠와 일제 하이메(Ilse Heime) 1926년 결혼했다.

 

나의 어머니가 나의 아버지와 어떻게 만났는가 하는 이야기를 나에게 말해줄 때 그것은 거의 요정이야기 같은 아주 아름다운 이야기로 들렸다. 나의 어머니 일제는 어린  소녀 시절에 그녀가 산꼭대기 위에서 자신의 남편을 만나게 되는 꿈을 항상 꾸었다. 이것은 바로 그들이 만난 상황이었다. 그녀는 산 위 한 쪽을 등산중인 일련의 소녀들 그룹과 함께 있었다. 반면에 슈츠는 산의 다른 쪽으로 올라가는 일련의 소년들 그룹과 함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정상에서 만났다. 나의 어머니는 그 날들에 커플로 만나는 것이 아니고 그룹으로 활동할 것을 매우 분명하게 했다. 이렇게 해서 나의 부모가 매우 젊었을 때, 나중에는 매우 중요하게 된 많은 우정관계들이 만들어졌다.

 

     결혼초 몇 년 동안 그리고 아이들을 가지기 전에 일제는 휴가뿐만 아니라 사업여행도 알프레드와 함께 했다.

     알프레드 슈츠는 1920년대에 한 저서를 펴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 후 몇년 후에 청취된 다음의 녹음내용은 그의 저술 작업에서 이루어진 중요한 발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학생시절 초기에 나의 형식적인 관심은 사회과학 특히 사회학에 대한 철학적 기초들에 빠져있었다. 이 시절에 나는 막스 베버(Max Weber)의 저서, 특히 그의 방법론적 저술들에 완전히 매료되어 있었다. 그러나 막스 베버는 그의 구체적인 연구를 위해서 그가 필요로 했던 도구들을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나는 곧 바로 알아냈다. 또한 그의 주된 문제는 - 행위자를 위해서 사회적 행위가 갖고 있는 주관적 의미를 이해하는 것 - 더 많은 철학적 기초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도 나는 곧 바로 알아냈다. 법철학에서 나의 스승인 한스 켈젠은 신칸트학파를 가르치는 중에 그런 철학적 기초를 발견하는 것을 보장해 주었다. 그러나 코헨(Cohen)과 나토르프(Natorp)의 저서나 에른스트 카씨러(Ernst Cassirer)의 초기 저서에서도 나에게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문제를 접근하는 하나의 길을 열어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베르그송(Bergson)의 철학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특히 의식과 내적 시간의 구조에 대한 베르그송의 분석은 의미, 행위, 기대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상호주관성과 같은 사회과학의 불분명한 기초 개념들에 대한 하나의 해석을 위한 출발점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확신했다. 그 당시에 나는 후설의 논리학과 인식론적 발견들을 바탕으로 켈젠의 순수 법이론을 정초하는  작업을 성공리에 시도한『논리학과 법학』이라는 그의 첫 저서를 쓰고 있던 고 펠릭스 카우프만(Felix Kaufmann)과 가깝게 관계를 맺고 있었다. 카우프만은 나에게 후설의 저서인 『논리연구』와 그 당시 오직 첫 권만 인쇄된 『이념들』의 첫 권을 연구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나는 이 연구에 가장 많은 주의를 기울이면서 수행했지만 이 책들에 대한 나의 감탄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들에서 내가 관심을 갖고 있던 문제들을 연결시키는 다리를 발견할 수 없었다. 이 때 즉 1928년에 후설의 저서『내적 시간의식에 대한 강의들』이 출판되었다. 베르그송 철학에 대한 나의 공부에 의해서 준비된 나는 즉시 후설 사상과 언어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29년에 후설의 저서『형식논리학과 선험논리학』이 나오고 상호주관성의 문제에 초점이 맞춰졌을 때 나는 내가 갖고 있었던 모든 의문들에 있어서 후설 사상의 중요성을 인정했다. 나는 처음부터 선험현상학의 문제들보다 후에『이념들』의 후서자연적 태도의 현상학에서 후설이 소개했던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나는 사회적 현실성을 탐구하는 어떤 시도에 있어서도 현상학의 주된 중요성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 자리잡고 있다고 느꼈다. 즉 그것 역시 후설이 정립한 것으로서, 환원된 선험영역에 대한 분석에 의해서 얻어진 모든 지식은 자연적 태도 안에서도 여전히 타당하다는 사실이다. 1932년에 출판된 한 저서에서 나는 내가 이해한 정도로 후설 현상학을 사용하고자 시도했고 사회세계의 의미-구조를 분석하기 위한 출발점으로서 베버의 방법론을 채택하고자 시도했다.

 

     슈츠는 후설에게 자신의 저서 한 권을 보냈다. 후설은 이 저서를 높이 평가했고 이 위대한 철학자가 1938년에 죽을 때까지 슈츠는 그를 한해에 3-4번 방문했고 그는 슈츠의 방문을 무척 환영했다. 슈츠는 후설 철학의 어떤 측면들에서는 합의를 보지 못했지만 여생기간 동안 자신을 현상학자로 인정했다.

    슈츠의 걸작은 5개 부분으로 되어있다. 이제 이들 중에 두 개 부분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이들 중에 하나는 주관적 의미를 다루고 있다. 이 주관적 의미는 슈츠가 막스 베버의 저서들로부터 갖고 온 개념이다. 그리고 미제스 교수가 슈츠에게 개인 세미나를 위해서 이들 저서들을 공부하라고 한 것은 흥미롭다. 주관적 의미들은 대상들, 행위들, 인간관계들이 사회세계에서 행위자들을 위해서 갖고 있는 의미들이다: 이것들은 저 행위자들에 관계하고 있다. 나는 어떤 때는 이들을내부인의 해석들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이런 대상들과 행위들 그리고 그밖의 것들로부터 갖고 있는 외부자의 해석들로 부를 수 있기를 좋아하는 것들과 대비된다. 하나의 예가 이 점에서 사용될 수 있다. 여러분이 시골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여러분은 한 남자가 나무를 도끼로 찍어내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보고 있지만 여러분은 그것을 이해하지는 못는다. 그는 한 도시인이면서 도끼로 야외에서 연습하고 있는 중일 수도 있다. 아마도 겨울을 위해서 나무를 저장하고자 나무를 찍어내고 있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는 바로 토론을 끝내고 화풀이를 하고 있을 수도 있다. 여러분은 그가 나무 조각들을 향해서 도끼를 휘두르고 있다는 것을 바로 보고 있기 때문에 주관적 의미를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 이 행위를 이해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행위자 자신이 그 행위를 위해서 갖고 있는 주관적 의미나 내부자의 상호해석을 알아내야만 한다. 이것은 때로는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는 해석들과, 여러분이 말할 수 있을 외부자 해석들과는 다르다. 어떻게 이것을 여러분은 알아내는가? 그렇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사람을 인터뷰하는 것이고 그들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판에 박힌 일들에 대해서는 여러분은 이런 일들의 주위에 바로 있을 수 있고 이 행동이 세우고 있는 대로 그리고 행위가 그것의 한 부분인 것처럼 이 행위를 볼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슈츠에게 있어서 사회과학의 기본지침은 사회적 행위자들에게 행위들과 대상들 그리고 그 밖의 것들이 주관적으로 의미하고 있는 바를 사회과학자가 파악해만 한다는 것이다. 사실, 사회과학에서 어떤 이론이 발전된다면, 그 이론의 용어는 행위자들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어야만 한다.

   이제 여러분에게 슈츠의 걸작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하기 전에, 나는 그의 부인 일제가 후에 슈츠의학문적 비서로 자신을 불렀기 때문에 그가 이 걸작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언급해야만 한다. 일제는 이 저서가 완성되기 전에 적어도 여섯 번의 초고를 받아썼고 타자를 쳐주었고, 이런 방식으로 그녀는 그 이후에도 슈츠를 수없이 많이 도와주었다. 또한 나는 슈츠의 일본 친구 토모 오타카(Tomoo Otaka)를 언급해야만 한다. 그는 후에 일본의 전후 헌법을 쓰는데 도와준 법철학자였고,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사진에서 그는  그의 가족과 함께 후설을 방문하고 있다. 그가 사용했던 돈이 실제로 그 자신의 돈이었는데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돈이 (일본)정부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을 하면서, 비엔나에서 책을 샀고 슈츠의 책을 출판하기 위해서 보조금을 마련해주었다.

     글자그대로, 슈츠의 영어 제목은 『사회세계의 의미구조』로 번역되었어야 했지만, 우리가 지금 이 사진에서 보고 있는 바의 이 창조적인 영어 번역은 실제로 오역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회적 세계라는 가장 일반적인 구조는 무엇인가? 우선적으로 우리들은 사회적 세계가 다른 사람들, 즉 타자들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여기서 라틴어는 사회(socii)이고 그러므로 우리는 사회적 세계를 갖고 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사회적 세계를 살아있는 현재의 세계와 죽은 과거의 세계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계로 구분하게 된다. 그러나 슈츠는 자아와 관계된 단어들을 사용하기를 더 선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있는 동시대인들과 이미 죽은 앞선 선인들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후세대인들을 갖고 있다. 다음으로 우리는 우리가 타자들과 관계할 수 있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우리가 실제로 알고 있는 것으로서 타자들을 이해함으로써 이루어지는 방법이다. 또 다른 방법은 타자가 그들에 대해서 행동하는 방식 또는 타자들에게 영향을 줌으로써 이루어지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서 의지가 담긴 어떤 기록을 써서 남김으로써 우리들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후세대인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지만 그들을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이 흥미로운 일이다; 이들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이것과 대비되게 만약 고인이 된 선인들이 우리들에게 저술이나 그림 또는 어떤 것을 남겨놓았다면 우리들은 이들 선인들을 이해할 수 있지만, 우리들은 그들에게 영향을 줄 수 없다. 그들의 삶은 이미 끝나버렸다; 그들은 이미 죽어있다.

   동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에 대한 흥미로운 일은 상호성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한 장소를 공유할 때, 여러분은 동일한 공간뿐만 아니라 동일한 시간 속에 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을 직접 이해할 수 있지만, 이들 타자들도 직접 되돌아서 당신을 이해할 수 있다. 비슷하게 여러분이 이들 타자들에게 직접 영향을 줄 수 있고, 그들도 직접 되돌아서 여러분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아마도 전화를 걸고 편지를 씀으로써 여러분은 간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앞선 선인들과 후세대인과 공유하지 못하는 동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런 상호성은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슈츠에게는 사회적 세계의 구조도 4개의 영역을 지니고 있다: 앞선 선인들과 후세대인들, 그가 한 장소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부른공동사회인들”(consociates) 그리고 동시대에 살고 있지만 동일한 장소를 공유하고 있지는 않은 사람으로서 동시대인들이 있다. 이것은 탐구하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아마도 학자들조차도 그것에 대해서 많이 묻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철학자에게는 그것은 대단히 좋은 물음이다. 그리고 슈츠가 기술한 것은 그것이 어떤 사회적 세계라도 적용될 것이다. 이것은 바로 이런, 저런 세계가 아니고 모든 사회세계에 대해서이다.

   1932년에 그의 저서가 나오고 점점 더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킨 후에 슈츠는 비엔나와 파리 사이를 왔다 갔다 여행을 하면서 오가는 길에 후설을 방문하였다. 그의 딸 에블린(Evelyn) 1934년에 태어났고 그는 무척 기뻐했다. 지적으로 그는 두 번째 저서를 준비하고 있었다. 죠지 슈츠가 기억하는 것처럼 이때 비엔나의 세계는 무너지고 있었다.

 

나는 독일이 군대의 힘으로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기 1-2주일 전에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2월 말에 태어났다. 나의 어머니는 창문 아래로 군대가 행진할 때 병원에서 실제로 숨죽이고 있었다. 그녀는 우리가 오스트리아를 정말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나의 아버지(알프레드 슈츠)는 우리들이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떠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의 어머니는 유대인으로 존재하는다는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어서 우리 가족이 1938년에 파리로 갈 때 나는 나의 누이의 인형유모차 속에서 오스트리아를 몰래 탈출하였다. 오스트리아 사람으로서 미국 국적을 얻는 할당이 우리 가족 중간에서 끝나서 나의 어머니는 영주권을 얻기 위해 미국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우리가 미국으로 이민가기 위해서 배를 탄 것은 1939년 그러니까 어머니가 가고 난 후 채 1년이 되지 않아서 이다.

 

     일제가 가족을 위해 영주권을 얻으러 뉴욕으로 갔을 때, 알프레드는 파리에서 그의 직장에 남아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츠는, 많은 양의 편지철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매일 밤 가족에게 힘을 북돋아주고, 그 어려운 시기에 가족과 개인적인 친구 그리고 교수친구들을 돕느라고 바빴던 것 같다. 이들 중에는 우선 슈츠의 부모와 장인 장모가 있었다. 그밖에는 전쟁 전과 전쟁 중에 그리고 전쟁 이후에 그의 선생이자 나중에는 친구가 된 루드비히 폰 미제스가 여기에 포함된다. 그리고 나서 한스 켈젠, 지그프리드 크라카우어(Sigfried Kracauer), 루드비히 란트그레베(Ludwig Landgrebe), 쟝 헤링(Jean Hering) 그리고 자크 마리탱(Jacques Maritain)이 있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전보에 따르면, 슈츠는 후설의 권고에 따라서  1935년 파리에서 알게된 아롱 거비취(Aron Gurwitsch)에게 죤스 홉킨스 대학에 자리를 만들어 주는 데 성공했다. 이 자리는 거비취와 그의 부인이 파리로부터 미국으로 이민가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미국에서 슈츠 역시 비엔나로부터 온 그의 친구와 계속 가깝게 지냈다. 여기에는 프리츠 마하럽 뿐만 아니라, 엠마뉴엘 빈터니츠(Emmanuel Winternitz), 펠릭스 카우프만, 에릭 푀겔린(Eric Voegelin) 그리고 그의 학교친구 프리드리히 폰 하이예크(Friedrich von Hayek)가 있다.

     미국에서 슈츠의 사업경력은 오스트리아에서 일한 같은 은행에서 계속되었고 그도 역시 그의 가족이 잠자러 간 후 밤에 계속 연구하였다. 그러나 부가적으로 그는 뉴욕의 뉴스쿨 대학교(the 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의 정치사회과학 대학원에서 강의하는 경력을 쌓을 기회를 가졌다. 그는 저녁에 가르쳤기에 집에 돌아와서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었고 다시 학교로 되돌아 갈 수 있었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번 강의하였고 마지막에는 사회학과와 철학과의 정식교수가 되었다. 사회학자 알베르트 살로몬(Albert Salomon)이 슈츠를 일반 세미나에 초대했을 때, 그는 뉴욕의 이 사회과학 연구소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 일반 세미나는 그가 20년전에 비엔나에서 루드비히 폰 미제스와 함께 경험했던 것과 비슷했다. 거기에는 그의 오랜 친구 펠릭스 카우프만도 - 그는 1949년에 죽었으며, 슈츠가 그를 대신하여 철학을 강의하게 되었다 - 있었다. 후에는 1930년대에 후설의 집에서 알게된 도리온 케른(Dorion Cairns)가 슈츠와 철학과에서 합류하게 되었다.

   알프레드 슈츠는 1944년에 미국 시민이 되었다. 그는 전후에 중앙유럽 경제가 어떻게 부흥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해 루즈벨트 행정부에 자문해주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리고 그는 이 새로운 정치체제에 대해서 분명하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의 연구는 거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이슈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방인”(슈츠)은 이 새나라(미국)에서 살기 위해서 온 사람들이 일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어렴풋하고 배후적인 지식을 포기하고, 새로운 문화양식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무엇이 일어나는가를 기술하고 있다. 나는 그가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참전용사들이 돌아왔을 때, 무엇이 일어나는가를 분석하기 위해서 제 1차 세계대전에서 돌아온 참전용사로서 자신이 겪었던 경험을 사용하였다는 사실을 앞서 언급했다. 그는 사회세계에서 합리성이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깊이 연구했다.

 

가족생활에 대해서 일제와 알프레드는 그의 어린 아들에게 음악에 기울이도록 했다.

 

나는 나의 어머니와 함께 음악을 듣는 방법을 배우면서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의 부친은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악보 읽는 방법을 배웠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내가 여섯 살 되는 해에 더 이상 음악을 읽을 수 없는 사고를 당했을 때 나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이것을 배워야 했다는 것은 아이러니였다. 그리고 이 새로운 방식은 근본적으로 그가 나에게 한 작품의 구조를 설명하고 나서 그것을 한 줄 한 줄 기억하게 하는 방법이었고 어떻게 그것이 함께 맞추어 지는가를 알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일로 얻어진 결과로서 흥미로운 일은 내가 한 작품을 연주할 때 그것을 계속 잊어버린다면, 나는 그가 나에게 가르쳐준 구조를 기억해냄으로써 다시 나의 방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러분이 만약 바로 귀로 배웠다면 여러분은 아마도 처음으로 되돌아가야 하고 여러분이 그것을 기억할 수 있기 전에 다시 전체를 배워야 할 것이다.

 

     이제 1945년에 출판된 알프레드 슈츠의 가장 유명한 에세이인다양한 현실성들에 관하여에 대해서 여러분에게 말해보도록 하자. 이 제목은 윌리암 제임스(William James)의 초기 저작으로부터 온 것이다. 이것은 네 가지 정신적 태도들이 슈츠에 의해서 여섯 가지 방법으로 비교되고 대조된 차트이다. 세 가지 점만을 알아보도록 하자. 우선 여러분이 하나의 태도에 있을 때 여러분은 일련의 대상을 믿고 다른 태도들의 대상을 믿는 것을 중지한다. 에포케는 신념을 중지하는 철학적 단어이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것을 믿을 때 그것은 여러분에게 하나의 현실성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이 에세이의 제목이다. 따라서 여러분이 매일 실제적인 일의 세계를 믿을 때, 상상과 꿈 그리고 이론화의 대상들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신념)은 중지된다. 그리고 여러분이 상상된 대상들을 믿을 때, 예를 들어 여러분이 무대에서 공연되는 작품을 볼 때, 일하는 세계는 임시적으로 중단된다. 이것은 꿈과 이론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두 번째로, 여러분이 직접으로 또는 간접으로 믿는 것은 실제 일함과 이론화의 태도에서는 바로 잘 조직되는 반면에 상상과 특히 꿈의 세계들은 그렇지 않다. 세 번째로, 슈츠가 사회성이라고 부른 것이 있다. 이 관점에서 둘 또는 그 이상의 사람들은 분명하게 일하는 중에 함께 행위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상상할 때에도 이를 행한다. 예를 들면 어린아이들은 진실게임(make-believe games)에서 이를 행한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상상할 수 있는 것처럼,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에 관해서 꿈을 꿀 수는 있지만 그들과 함께 꿈을 꾸지는 못한다. 그리고 이론화도 꿈과 같다. 여러분이 실제로 이론화작업을 할 때, 여러분은 반드시 혼자이거나 연대하고 있다. 이런 분석에서 슈츠의 주된 목적은, 세계가 구성되어 있는 과학(학문)에서 이론적인 사유와 일상적인 실천적 삶에서 계속되는 노동(일함)을 대비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여러분들에게 특히 과학 철학자들에게 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상세한 것을 지니고 있는 놀라운 분석이다.

     슈츠의 에세이에 대해서 두 가지 결말을 볼 수 있다. 첫 번째로 그는 그의 에세이에서 이런 분석을 보여주기 위해서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를 사용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이 사진에서, 오르테가 이 가세트(Ortega y Gasset) 바로 뒤에 서있는 루이스 레카센스 씨쉐스(Luis Recasens Siches) - 그는 슈츠의 멕시코 친구이기도 하다 - 이 에세이를 번역했고, 이것은 위대한 현상학자인 에드와르도 니콜(Edwardo Nicol)에 의해서 출판되었다. “다양한 현실성들에 대하여에 있어서 또 하나의 결과는 슈츠가 일상의 삶에서 현실성을 넘어선 대상들을 믿기 위해서 우리들이 예술과 종교 그리고 과학에서 상징들을 사용하는 방법을 계속적으로 탐구하는 중요한 에세이라는 것이다. 슈츠의 에세이들은 여러 해에 걸쳐 쓰여졌다. 그는 철학 논문들을 밤에 연구하면서 썼을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과 함께 휴가 중에도 연구하면서 썼다.

 

     [필름]

 

     사회과학 철학의 다른 이름은 방법론이다. 알프레드 슈츠의 방법론은 사회세계의 학적 모델들이 사유 중에 어떻게 세워지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런 이론화작업은 물론 그것이 불려질 수 있는 것처럼 이론적 태도에서 행해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론적 태도에 대해서 우리는 이미 들었다. 더 나아가서 궁극적으로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가 이미 그것에 대해서 들은 주관적 의미들이다. 사회과학들의 방법론에 대한 슈츠의 최선의 진술은 1953년에 출판되었고 그의 『총서』 제1권 첫 장에 그대로 재 인쇄되어 있다.

     하나의 친근한 예를 상상해보자. 수십명의 손님들이 왔다갔다 하며, 십여명의 판매원이 있는 한 가게를 생각해 보자. 고객들과 판매원들이 행하는 역할들은 엄밀하게 똑같지 않다. 판매원들은 물건을 훔치는 사람을 감시해야만 한다. 고객들은 이것을 하지 않는다. 이들은 한 고객이 어떻게 옷을 입고 있는지 이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이들이 어떻게 서있는지, 이들이 몇 살인지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이들이 하는 것은 일종의 윤곽을 세우는 것이다. 바로 물건을 슬쩍 훔치는 고객이라고 볼 수 있는 의심스러운 고객이라는 - 슈츠와 막스 베버가 소위 말하고 있는 - ‘이념적 유형이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입장이 있을 수 있다. 사회과학자는 판매원들이 의심스러운 고객에 대한 이념적 유형을 형성하는 방법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여러분은 이런 판매원들을 인터뷰할 수 있다; 여러분은 이들이 행동하는 방식을 관찰할 수 있다. 그것은 참여하는 관찰이다. 나중에 사회과학자들은 이것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고 어떻게 판매원이 어떤 고객들을 물건을 훔치는 잠재적 사람으로서 해석하는가에 대한 자신의 유형을 형성할 수 있다. 또한 다른 입장이 여전히 있을 수 있다. 이 입장은 방법론자의 입장이다. 방법론자는 판매원이 어떤 고객들을 어떻게 해석하는가를 사회과학자들이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관심을 갖는다. 따라서 여기서 해석의 세 가지 레벨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알프레드 슈츠에 따르면 근본적으로 방법론자가 행하고 있는 것이다.

     1955년과 1956년에 알프레드 슈츠의 사유는 다시 한번 실천적인 이슈들로 돌아선다. 그는 미국의 유대교 신학대학이 지원하는 연구소와 두 개의 회의에 2주 동안 초청된다. 여기서 관심은 결과평등이 아니라 기회평등이었다. 여기서 슈츠가 발표한 주된 논문는 내가 믿건데 그의 가장 탁월한 에세이였다. 이것은 현실 문제들에 대해 초점을 맞추지는 않았다. 이 초점은 그의 이방인, 귀향자 그리고 정신적 교육이 잘된 시민들에 대한 에세이에서 이미 존재한다. 그러나 그는 사회적 그룹들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앞선 저서에서의 초점은 그룹에 대한 것이 아니고 타인들과의 관계를 맺고 있는 개인 자신들에 대한 초점이었다. 참가자들은 군락상태, 종교, 인종, 성별 등에 기초를 둔 그룹들을 고려했다. 그리고 슈츠는 토론에서 나이에 기초한 그룹들에 대해서 언급할 기회를 발견했다. 그가 반대한 것은 오늘날나이주의'(ageism)로 불려지는 것이다.

     참가자들은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유럽계 미국인 사이 또는 그 당시 말로는 흑인과 백인 사이의 관계들에 대해서 관심을 집중시킬 것을 결정했다. 결국 그 이듬해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미국에서 공립학교의 인종 통합을 착수하게 해주었던 교육위원회 대 브라운의 대법원 결정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아칸사스 리틀 록에 군대를 파병했다. 대법원에서 소송에 이기고 대법원의 구성원이 되어버린 써굿 마샬(Thurgood Marshall) 1955년 회의에서 찍은 이 사진에서 슈츠로부터 오른쪽 세번째 자리에 앉아 있다. 모든 참가자들은 한편에서는 추상적이고 철학적이며 신학적인 생각들과 다른 한편에서는 일상적인 삶에서 사람들의 행동을 인도하는 상식적인 생각 사이에서 중간의 토대를 발견하고자 했다.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은 추상적인 원칙들로부터 시작했지만, 슈츠는 특징적으로 일상적인 상식의 측면에서 기회균등을 접근하는 데 관계했다. 물론 그는 그룹들에 속해있는 개인들이 공유하는 주관적 의미들, 또는 내부인 해석들에 의지한다. 더 나아가서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의 자신의 경험들에 의존한다. 그리고 이 제국은 바로 다양한 문화 제국이었다.

     두 가지 종류의 소수 그룹들이 존재한다. 한 그룹은 이 그룹의 전체적인 삶의 방식과 그룹 전체 문화를 유지하기를 원하고 이 그룹은 이 사회 안에서 여전히 평등하게 다루어지기를 원한다. 다른 그룹의 구성원들은 사회의 주된 흐름의 삶의 방식을 채택하기를 원하고 융화되기를 원한다. 슈츠는 두 개의 모든 유형을 인정했다. 첫 번째 유형은 오늘날 멀티문화주의로 불린다. 특히 슈츠는 건너 머달(Gunner Merdall)에 의해서 발견된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유럽계 미국인의 상식적으로 우선하는 것들 사이의 대비를 언급했다. 따라서 가치와 문화전망들에서 차이들이 존재하지만, 철학과 종교로부터 조금씩 나오는 평등관념들 역시 존재한다. 결국 슈츠는 분명히 사회계급의 요인과 따라서 그룹들 사이에 경제적 권력과 정치적 권력들이 평등을 추구하는 것에, 그리고 평등을 부여하는 위치에 그룹들이 있는지, 있지 않은지에 관심을 환기시키고 있다. 더 나가서 그는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사회적 긴장을 완화시키는 교육을 주장했다. 1950년대의 그의 사상은 오늘날의 실정과도 무관하지 않다.

     알프레드 슈츠는 그가 미국에서 사는 동안 현상학 운동에 기여했다. 20년 동안의 많은 것들이 그의 친구 아롱 거비취와 서신교환에서 기록되어 있다. 도리온 케른즈와 아롱 거비취 그리고 허버트 스피겔버그(Herbert Spiegelberg)와 함께 슈츠는 1940년에 마빈 화버(Marvin Faber)의 지도아래 국제 현상학회의 창립 멤버였고 그 이후에는 저널 『철학과 현상학 연구』편집을 위해 활동했다. 전쟁이 끝난후 곧바로 그는 사업상 정규적으로 유럽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그는 유럽에서의 현상학 발전에 참여했다. 그는 신부 반 브레다(van Breda)가 후설 문서보관소를 세우는 데 도와주었다. 그것의 한 지부가 바로 1969년 뉴욕의 사회과학 연구소에서 슈츠의 추모 속에 건립되었다. 그는 메를로-뽕띠(Merleau-Ponty)로부터 막스 쉘러의 저서에 대해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아들였고, 현상학의 여러 학회에 참석했다. 그러나 슈츠가 50대 후반의 나이에 들어섰을 때, 그의 건강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이 사진에서 보듯이, 그는 어느 날 저녁 그의 집에 있는 서고 앞에다가 자신의 초상화 한 장을 그려놓았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에 대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슈츠에 대한 두 가지 개인적인 기억들을 전해보도록 하자. 두 번째 기억보다 첫 번째 기억이 더 형식적이다. 슈츠의 제자 프레드 커스텐(Fred Kersten)은 아롱 거비취가 『철학과 현상학 연구』에 기고한 사망기사의 일부를 우리에게 읽어줄 것이다.

 

알프레드 슈츠는 1959 5 20일에 뉴욕에서 별세했다. 알프레드 슈츠는 아주 독특한 인간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아주 -